비평가 시절의 필명은 한스 루카스. 1930년 12월 3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스위스 니용에서 자랐고 파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다가 중퇴하고 1950년 「가제트 뒤 시네마」에 처음으로 글을 발표하였고 1951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였다. 댐 공사장 인부로 일하다가 앙드레 바쟁을 만나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부 기자로 일했으며, 자신의 영화동지들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감독이 되었다. 아마도 장-뤽 고다르처럼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감독은 드물 것이다.
50년대 미국 장르 영화에 대한 연구와 함께 영화에 발을 들인 그는 「까이에 뒤 시네마」의 동료들 중 에릭 로메와 자끄 리베뜨의 초기 단편영화 작업들을 도우며 그 자신도 몇편의 단편을 만들었다. 자신이 일했던 스위스 댐 공사장에서 찍은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작전>(54), <모든 청년의 이름은 파트릭>(57), 편집 연습용 영화 <물 이야기>(58)가 있다(<물 이야기>는 프랑스와 트뤼포가 만들다가 포기하고 고다르에게 넘겨준 영화이다). 영화 제작과 비평의 작업 사이를 왕복하는 동안 고다르의 방법은 오마쥬와 재창조,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통한 변화로 이어져왔으며 영화가 무엇이며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왔고, 자신의 영화평론을 항상 영화만들기와 같다고 비유하여온 그 자신의 말처럼 역설적으로 그의 모든 영화는 영화평론처럼 만들어졌다.
장편 데뷰작 <네멋대로 해라>(59)에서 고다르는 전통적 내러티브를 무시하고 형사물과 코미디, 서스펜스 장르를 즉흥적으로 섞어놓았다. 비평적 지식을 뮤지컬과 공상과학영화의 장르로 각각 옮겨놓은 <여자는 여자다>(61)와 <알파빌>(65)에서 에세이 형식을 빌어 만든 <비브르 사 비>(62), <결혼한 여자>(64), <남성, 여성>(66)에 이르는 동안 고다르는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개척해나갔다. <여자는 여자다>(당시 아내 안나 까리나에게 보내는 사랑의 노래)만을 제외한 이 시기 고다르의 영화들은 어둡고 우울하며 모더니스트적이다. <삐에로 미치광이>(65)는 도시의 혼란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피해가지만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과 의사소통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언어의 모호함을 표현했고, <경멸>(63)의 영화감독 프리츠 랑과 헐리우드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부부의 불신 역시 메타포와 반영의 역할을 한다. 자기 영화 속의 인물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지만, 고다르 자신은 매 영화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행가방 같은 영화(단편 모음)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67)의 에피소드 ‘미래전망’은 긍정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미래의 소비에트아메리카 군대의 군인이 ‘정신적’ 매춘부에게서 치료를 받기 위해 송환되고 그들은 함께 키스를 새로이 ‘발명’한다. 그러나 당국은 그들을 위험인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랑을 하고, 발전하고, 동시에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66)에서 영화제작자이자 나레이터인 고다르는 그가 묘사하는 세계의 기능장애에 대해 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