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테네시주 크녹스빌에서 태어난 쿠엔틴 타란티노는 90년대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다. 법대생이자 배우 지망생이었던 21살의 아버지와 간호원이 되려고 공부중이던 16세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 Gunsmoke>에서 버트 레이놀즈가 맡았던 캐릭터인 "퀸트"를 이름을 따라 쿠엔틴 타란티노라고 지었다. 타란티노가 2살이었을 때 그의 가족은 LA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쭉 자랐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는 엄마를 따라 극장출입을 했던 타란티노는 8살 때 < Carnal Knowledge>를 보았고, 9살 때 < Deliverance>를 보았다. 22세에 그는 캘리포니아 맨해턴 비치의 비디오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하루 종일 비디오를 보고, 토론하고, 손님들에게 비디오를 추천해주면서 지냈다.
1986년에 그의 최초의 영화 < My Best Friends Birthday>(1986)를 만들었고, 이듬해에 첫 시나리오인 <트루 로맨스>(1993)를 완성했다. 이 사이에, 그는 배우학원에 다니면서 자신의 연기경험을 담은 기록작품도 하나 만든다. 1987년 <리어왕>으로 배우로 데뷔했다. 그는 같이 비디오 점원으로 일했던 로저 애버리와 함께 <트루 로맨스>를 영화화하기 위해 애쓰지만 일이 잘 되지 않자 시나리오를 팔았다. 이즈음 타란티노는 두 번째 시나리오인 <내츄럴 본 킬러>를 탈고했는데 이 당시에는 <트루 로맨스>를 판 돈을 가지고 자신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내츄럴 본 킬러>(1994)도 자신이 영화화하기가 여의치 않자 올리버 스톤 감독에게 넘긴다. 1990년에는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의 대본을 마무리지었다. 타란티노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도 팔아서 <저수지의 개들>(1992)을 만들려고 한다. 이때 훗날 대부분의 그의 영화를 제작하게 되는 로렌스 벤더를 만나게 되는데 벤더는 마침 하비 키이텔 아내의 친구가 운영하는 연기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에 반한 키이텔은 재정지원을 해주면서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고 다른 배우들 섭외까지 도와주었다.
1991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자신이 미스터 화이트로, 스티브 부세미가 미스터 핑크로 출연하는 몇 씬을 선보였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저수지의 개들>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1992년 상영되었고 미라맥스사가 배급을 맡으며 전세계에 타란티노의 이름을 알렸다.
<펄프픽션>(1994)이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를 무시하면서 냉정하고 안하무인격의 태도, 독설과 농담으로 세상을 비웃는 타란티노는 일약 싸구려 대중문화의 대변인이자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 영화에 등장한 존 트라볼타는 아카데미 영화제에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퇴락한 배우에서 일순 다시 정상의 자리에 올라섰고, <펄프 픽션>은 그 해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등 총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타란티노는 메이저 헐리우드의 배우이자 프로듀서가 되었고, 배급일까지 해내고 있다. 저예산 영화 < Sleep With Me>에서 배우로 출연했고, <포룸>의 한 부문을 맡아 감독, 연기했으며,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엘 마리아치>, <데스페라도>에 출연하였으며, 코미디 < Destiny Turns on the Radio>에서는 주연으로 등장했다. NBC TV < ER>과 마가렛 조의 시트콤 < All-American Girl>를 일부를 담당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조지 클루니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각본, 프로듀서, 배우를 맡기도 했다. 과도한 폭력장면과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그의 스타일이 여전히 엿보이면서도 보다 고도의 두뇌싸움을 펼쳐 보인 <재키 브라운>(1998) 역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평론가들의 호평 또한 대단했다. 1999년에는 다시 <황혼에서 새벽까지 2>의 제작자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