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2월 20일 미국 미주리 주 캔사시 시티에서 보험 세일즈맨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되던 해에 성 패터스 카톨릭 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싸구려 녹음기로 사운드 실험에 심취해 록허스트 고교로 옮길 때까지 계속 카톨릭 학교에 다녔다. 고교 졸업 후 렉싱턴의 웬트워스 사관학교에 들어가 초급대학 과정을 마치고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1947년 캔사스 시티의 메이저 스튜디오인 캘빈 사에 입사해 광고와 다큐멘터리 등 영화제작에 관한 수업을 받았다. 1957년 첫 장편 <범죄자들>과 팝 컬처 아이콘에 관한 탐구적 다큐드라마 <제임스 딘 이야기>(57)를 찍은 후 수많은 TV물을 연출했다.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을 관찰해온 알트만은 「전투」, 「알프레드 히치콕 시리즈」, 「보난자」 등의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쌓은 테크닉으로 반전과 놀라운 에피소드를 짜내는 명수이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은 제작방식으로 60년대 중반까지 장편영화를 만들 기회를 번번히 놓쳤다.
<카운트다운>(68), <공원에서의 그 추운 날>(69) 이후 첫번째 흥행성공작 <매쉬>(70)로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아메리칸 뉴 시네마 세대에 뛰어들었으나, 또한 뉴 시네마 시대 영화의 아웃사이더로서 70년대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로버트 알트만은 여기서 줌 렌즈를 이용하여 새로운 미장센을 시도하였으며, 사운드에 관한 끊임없는 탐색을 한다는 점에서 누벨바그의 영화감독들과 가까이 있었지만 동시에 헐리우드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계속 아이러니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뉴 시네마의 영화 감독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라이온 게이트 프로덕션을 만들어 다층적인 인물분석인 <음모가 맥클라우드>(70), ‘서부영화의 레퀴엠’이라고 불리운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71), <선셋 대로> 이후 헐리우드에 대한 가장 비관적인 비판이라고 불리우는 <긴 이별>(73),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리메이크인 <우리 같은 도둑>(74)을 만들었고 흥행에는 참패했다.
1975년의 <내쉬빌>은 아카데미 노미네이트와 함께 관객에게도 인정받은 작품으로 여러 겹의 서사구조, 신선한 캐릭터, 위트있는 음악 등을 통하여 이후 알트만의 영화 여정에 하나의 단초를 제공해주었으며, ‘70년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격찬을 받기도했다. 그러나 이듬 해 알트만 스스로 ‘브레히트의 「역사수업」에 필적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선언한 미국사의 마케팅에 관한 야심만만한 탐구인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76)이 흥행에서 실패하고, 제작자 디노 디 로렌티스와의 불화로 <랙타임> 연출을 해고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닉슨의 독백으로 유명한 <은밀한 영광>(84), 데이빗 레이브의 연극을 각색한 <국기>(83)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알트만은 80년대 후반을 TV 시리즈 연출에 몰두한 후 반 고호와 그의 동생 테오에 관한 매우 기이한 전기영화 <빈센트와 테오>(90)를 거쳐 헐리우드 풍자극 <플레이어>(92)로 본격적인 90년대로 맞는다. 레이먼드 카버 원작의 포스트모던 태피스트리 <숏 컷>(93)으로 이어지는 90년대의 그의 여정은 <패션쇼>(94)를 거치면서 다층적 내러티브 구조와 주인공 없는 그랜드 호텔 양식의 등장인물들 사이로의 이동을 통해 씨줄과 날줄을 엮어내는 알트만 특유의 구조를 완성해낸다. 96년 재즈의 잼 세션을 영화 구조로서 차용한 <캔사스 시티>를 통하여 40년 연출경력의 노장이 행하는 끊임없는 형식실험의 장을 보여주었으며 현재 케네스 브래너를 캐스팅한 <빛좋은 개살구>를 촬영중이다. 헐리우드 주변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90년대 미국영화의 중심인 말 그대로의 대가, 혹은 주변과 중심을 잇는 헐리우드의 반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