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태
바닥엔 피가 낭자하고 불길한 톱질이 이어진다. 가슴 깊숙이 참았던 숨을 토해 내던 엄마는 생일케이크를 앞에 두고 아들 형태를 호출한다.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영화는 한 가족이 겪은 폭력의 트라우마를 대담하게 그려낸다. 무채색의 현실의 뚫고 펼쳐지는 회상에는 큰아들 진태와 둘째 형태 사이의 물고 물리는 폭력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감독은 이 비극의 중심에 끈질기게 엄마를 세워 놓는다. 지난날 폭력 앞에서 애써 모른 척 눈감았던 엄마는 순환되는 폭력의 고리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묵인과 방조의 시간들은 탈출과 구조의 골든 타임을 빼앗고, 죄책감만으로는 어둠 속에 매장된 과거를 구원하지 못한다.
2/ 작년에 봤던 새
제주도에 사는 선재는 양수의 카페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양수의 카페가 있는 지역이 제주 제2공항 건설지로 결정되고 양수는 어쩔 수 없이 카페를 내놓는다. 선재도 덩달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이지만 청각 장애가 있는 선재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 <작년에 봤던 새>는 공항 건설로 인해 원치 않는 삶의 변화를 겪어야 하는 이들의 시간을 담는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자연스럽게 담길 때마다 거꾸로 인물들의 처지는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카메라는 불가항력적인 변화 앞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침착하게 뒤따른다.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차분한데, 그래서 오히려 더 깊고 오래 퍼져 나가는 파장을 남긴다.
3/ 춤,바람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지완은 상사의 닦달에 피로감을 느낀다. 무더운 주말에도 노트북을 붙들고 자료를 만드는 것도 생존의 절박함 때문이다. 지완은 집이 더운데다 어디선가 들려온 종소리를 기회로 삼아 산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을 해 보려는 시도는 관광객들의 소음 탓에 이뤄지지 않는다. 고즈넉한 곳을 찾던 지완은 ‘피난처’라고 적힌 공간을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술 한잔을 걸치며 여유를 갖는다. 이때 어디선가 신비한 바람이 불어오고 이 바람을 따라간 지완은 절에 다다른다. 지완은 자신이 ‘바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소년을 만나 숨바꼭질을 하면서 순수한 즐거움에 빠져든다. <춤,바람>은 해외문화홍보원에서 국가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의 하나로 출발한 영화인 탓에 목적성이 분명하긴 하지만, 단순한 ‘홍보 영상’은 아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에게 바람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살아 볼 것을 제안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생각보다 깊이 와닿는다. <명왕성>(2012), <마돈나>(2014), <젊은이의 양지>(2019) 등을 만든 신수원 감독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날카롭게 도려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를 통해 세파에 지친 관객들에게 산사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를 제공하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