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굿타임
퀵서비스 라이더 형도의 오늘은 만만치가 않다. 오토바이는 고장나고, 행인과 시비가 붙은 데 더해 누나는 아버지가 또다시 중환자실에 갔다며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병원에 가는 대신 돈이 들어온다는 금전수를 배송하게 된 형도. 그는 출발 전 고객에게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 이는 순간 영화에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돈이 없으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쓰라린 현실과 그에 맞서 소리 없이 울부짖는 형도의 몸짓, 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에 자신의 몫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형도의 모습이 영화에 깊게 각인된다. 금전수를 소재로 씁쓸한 현실을 그려낸 연출력과 형도를 연기한 권다함 배우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2/ 나의 침묵
초등학생인 준영은 동생 원이와 함께 집 근처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갔다가 그곳에 살고 있는 동급생들과 마주친다. 이들이 준영을 대하는 태도는 호의적이지 않고, 사정도 모르면서 그저 신이 난 동생은 당황한 준영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준영아, 너 여기 살아?”라는 질문에 생각할 틈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마는 준영. 아이들은 준영에게 이 아파트에 산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지하실에 들어갔다 오라며 등을 떠밀고,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준영은 동생 손을 잡고 지하실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데.... 지하실의 풍경만큼이나 두려운 것은 지하실 밖 현실이다. <나의 침묵>은 어른도 없고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세계에서 홀로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준영의 세계를 서늘하게 묘사해 간다. 그리고 ‘휴거(휴먼시아 거지)’나 ‘임대충(임대아파트 거주자)’과 같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시대의 공기를 포착한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공포 속에서 관객은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제목에서 ‘침묵을 하는 나’란 도대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건 혹시 관객인 우리가 아닐까.
3/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주인공은 금빛 광물이자 데이터 클러스터(파일 저장 단위) ‘페트라’다. 시공을 초월한 이주의 여정에 오른 페트라는 경계의 섬 ‘크립토밸리’에서 이주 심사를 받지만, 당국은 페트라를 외계인 혹은 시스템에 침투한 바이러스로 간주한다. 제목의 ‘트릭스터’란 사회문화인류학에서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 속 존재를 뜻한다.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상태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페트라의 고단함은 전 지구적으로 도래한 난민 문제와 중첩된다. 이들을 가로막는 ‘국경’이란 개념은 영원히 움직이는 지각판 위에 놓여 있다. 미술 작가이기도 한 김아영 감독의 2017년작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의 후속작이다. SF의 외피를 띤 철학적인 세계관은 시의적절할뿐더러 시각을 압도한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익스팬디드 부문에 초청됐다.
4/ 실
명선은 오랜 시간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봉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 온 베테랑이다. 유명 배우가 자신이 주문을 받아 제작한 디자이너 제품을 입고 출연한 드라마를 보는 것이 그의 큰 낙이다. 그러나 일감은 점점 줄어들고 가깝게 지내던 동료 현마저 창신동을 떠나자, 명선 역시 고민에 빠진다. 창신동에 봉제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한국전쟁 후 구제품을 떼다 파는 옷시장이 열리고,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 평화시장이었다. 평화시장이 흥성하면서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창신동 판자촌 사이로 봉제공장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한국의 의류산업과 함께 봉제골목 역시 성장했다. 그런 봉제공장의 노동 착취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 고통의 역사를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곁에는 약을 먹고 잠을 쫓으며 마감을 맞춰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실>은 실제로 창신동에서 봉제 일을 하는 아마추어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 노동의 역사를 과거에 박제하는 ‘단절’이 아닌 지금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지속’으로 기록해낸다. 유머가 살아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