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주는 고시원의 밤이 끔찍하다. 주말총무를 맡아 보며 공짜로 살고는 있지만, 볕도 안 드는 쪽방에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소음은 그녀의 웰빙 욕구를 끝없이 자극한다. 고향 친구 은성의 구애도 물정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철들면서부터 모아온 적금을 털면 이제 겨우 제 방을 마련할 참이라, 학습지 교사로 일하는 평일에는 매일 수십 개의 초인종을 누르며 실적을 관리해야 한다. 오늘도 큼직한 학습지 가방을 메고 문전박대만 당하던 그녀는, 어느 골목 끄트머리에서 대문 열린 빈 집을 발견한다. 부동산 개발회사 이사인 석희는 오늘도 현관이며 대문까지 열어둔 채 출근한다. 언젠가 빈 집에 쓰러졌던 그녀를 구한 건, 배가 고파 담을 넘었던 부랑자였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런 부랑자나마 발길을 끊지 않도록 매일 한 사람 분의 식탁을 차려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겐 낯선 자들의 틈입보다 자신의 죽음이 방치될 것이라는 불안이 더 무섭다. 매일 진통제에 의존해 견디는 나날. 집과 남은 재산의 기증에서부터 자신이 입게 될 수의의 빛깔까지 그녀는 그렇게 갑자기 닥쳐올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귀가한 석희는 딸아이 방에서 곤히 잠든 언주를 만난다.